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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 무라카미 하루키


"나를 기억해줬으면 해. 내가 존재했고, 이렇게 자기 옆에 있었다는 사실을 언제까지나 기억해줄래?"

"봄날의 들판을 네가 혼자 거닐고 있으면 말이지, 저쪽에서 벨벳처럼 털이 부드럽고 눈이 또랑또랑한 귀여운 아기 곰이 다가오는 거야. 그리고 네게 이러는 거야. '안녕하세요, 아가씨. 나와 함께 뒹굴기 놀이 안할래요' 하고. 그래서 너와 아기 곰은 서로 부둥켜안고 클로버가 무성한 언덕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온종일 노는거야. 어때, 멋지지"
"아주 멋져."
"그만큼 네가 좋아."


    일본 작가들의 문체는 다 이렇게 맑고, 깨끗하고, 서정적이고, 슬픈걸까? 이 책은 내가 처음 접하는 무라카미 하루키고, 많은 일본 책을 읽어보지도 못했지만, 적어도 좋아하는 또하나의 일본 작가, 에쿠니 가오리의 문체도 이랬다. 슬픈 얘기를 하고 있는 순간에는 물론이거니와 평범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조차도 슬프다. 어떤 슬픔이냐 하면, 슬프다는 감정이 아니라 정서다. 눈물 펑펑 쏟고 꺼이꺼이 우는 슬픔이 아니라 별빛같은 슬픔이다. 별빛이라는 말이 좀 애매하다면, 실연당하고 그 다음날 느끼는 슬픔이 아니라 6개월 쯤 지나서 느껴지는 슬픔이라고 하면 다가올까. 일본 영화인 <러브레터>, <지금 만나러 갑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것은 다른나라와 달리 일본에 깔려있는 정서일까? 내가 일반화 시키는 걸까? 

    이 책은 정말 야하다. 성에 대해 너무나도 적나라하고 약간은 변태적이고 그러면서도 담담하게 묘사해서 오히려 거리껴하는 내가 이상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감미로운 연애소설을 쓰기 위해 이렇게 많은 성적인 장면이 필요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와타나베는 나오코를 사랑하면서도 그것과 별개로 의미없이 여자들과 밤을 보낸다. 나오코와 와타나베가 딱 하룻밤 보냈던 그 밤 이후 나오코는 잠적해버렸다. 나오코는 그 밤을 자살하기 직전에 얘기한다. 미도리와 와타나베는 온갖 성적인 환상을 얘기하지만 그뿐이다. 섹스는 이 책을 관통하는 가장 큰 키워드 중 하나이고, 그것은 등장인물간의 관계들을 형성하는 큰 축이다.

    등장 인물들이 모두 20대 초반, 나와 비슷한 연령대라는 점에서 나역시 일단 등장 인물들에 공감할 태세를 갖추게 된다. 그러나 모두들 젋은 날의 행복한 시절을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상처 입고 불완전하다는 점에서 그 공감이 마음 아프게 다가온다. 나오코는 기즈키와 언니의 자살로 인해 정신병에서 요양하고, 미도리는 엄마 아빠를 차례로 잃고, 레이코는 초등학생 여자애에게 자신을 성추행한 레즈비언으로 몰리며, 와타나베 역시 정신적으로 혼란스럽다. 지켜보는 나도 안타깝고 슬픈데, 한 편 이렇기 때문에 이들의 사랑이 더욱 아름답고 열정적으로 느껴진다. 

    나오코와 와타나베는 기즈키의 죽음을 함께 겪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 둘은 서로를 아픔을 채워줄 수 있는 한편 서로를 기즈키의 죽음에로 묶어두는 역설적인 관계이다. 이 둘의 사랑이 비극으로 끝난건 필연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서로를 사랑하지만 기즈키의 죽음이라는 극복할 수 없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도리는 아주 발랄하고 톡톡 튀면서도 감정 기복이 심해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매력적인 인물이다. 어릴 때부터 애정에 결핍되어 있어서 사랑을 갈구한다. 그런 그녀에게 '봄날의 아기곰만큼 네가 좋아.'라는 대사는 어떻게 다가왔을지를 생각해보면 나 역시도 가슴이 설렌다. 마지막 장면이 와타나베의 미도리에 대한 열정적인 고백으로 끝난다는 것이 좋다.

    이들은 어리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사랑이 더욱 절대적인 가치로 다가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이 이들을 사지로 몰아가기도 하고 구원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끊임없이 사랑을 하고 갈구한다. 나 역시 내 과거와 현재를 떠올리며 이들에게 절절히 공감했다. 비록 아픔이 있더라도 사랑하고 있는 순간 자체가 환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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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KS청년 2012/01/16 09:40 # 답글

    하루키 초기작들은 정말 깨끗하고 서정적이죠. 요즘 책들은 거기에 성숙미까지 더해 진 것 같구요.
    그 매력에 사람들이 하루키를 많이 읽나 봅니다^^ 저도 20대 초반에 하루키에 푸욱 빠져있었지요. 근데 너무 사람을 다운시키기도 해서 그 이후에는 가능한 안 읽을려고 했네요ㅎ 지금도 그렇구요~ 마약같은 하루키ㅋ 이분 때문에 맥주를 즐길 줄 알게 되기도 했습니다~
  • 변냥 2012/01/16 12:04 #

    오오 요즘 나온 책들 읽어보아야겠습니다. IQ84가 가장 최근에 나온 건감.. 기분을 다운시키는 건 정말 맞는 말이에요ㅠ 일단 몇 권 더 읽어보고 마약을 끊을지 말지 결정해보아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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